[007]2026.03.24log

Something went wrong

AI의 판단을 맹신하면 안 되는 순간

결제 버튼을 눌렀다. 모달 창이 열렸다. 카드 정보를 입력하는 화면이 나와야 했다. 대신 이것이 나왔다.

"Something went wrong."

다섯 단어.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에러 코드도 없고, 상세 메시지도 없다. 그냥 "뭔가 잘못됐다."

관제탑에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AI가 에러를 진단하는 대신, 나에게 질문을 했다.

"마스터 플랜 문서에는 결제 서비스로 LemonSqueezy가 지정되어 있는데, 현재 구현은 Paddle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변경되었나요?"

그리고 이어서 하나 더.

"Unlimited 티어가 $19/월인데, Max 티어가 $29/월입니다. 상위 티어가 더 비싼 게 일반적인데, Unlimited가 왜 더 저렴한가요?"

두 질문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질문 모두 — 전제가 틀려 있었다.

LemonSqueezy에서 Paddle로 바꾼 건 의도적인 결정이었다. Paddle이 MoR(판매 대행자) 역할을 해서 전 세계 세금 처리를 자동으로 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든 서비스를 미국인이 사고, 일본인이 사고, 유럽인이 살 때 각각 다른 세금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데, Paddle이 이걸 대신한다. 마스터 플랜은 이 결정 이전에 작성된 문서였다.

Unlimited 티어가 더 싼 것도 의도적이었다. BYOK — "Bring Your Own Key"라는 모델이다. 사용자가 자기 AI API 키를 직접 가져와서 쓴다. 그러면 내가 AI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AI 비용이 빠지니까 가격이 내려간다. 사용량은 무제한이지만 비용은 사용자가 직접 부담하는 구조.

AI는 이 맥락을 몰랐다. 마스터 플랜이라는 "오래된 문서"를 참조했고, 일반적인 가격 체계의 상식을 적용했다. 두 가지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현재 상황에 맞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AI에게 이렇게 말했다.

"claude.md를 확인해."

claude.md는 프로젝트의 최신 설정 파일이다. 마스터 플랜보다 더 최신의 결정사항이 반영되어 있다. AI가 이 파일을 읽고 나서야 "아, Paddle로 변경한 것이 의도적이었군요. BYOK 구조도 이해했습니다"라고 했다.

전제를 교정하자 진단이 달라졌다.

AI가 용의자 세 명을 좁혀왔다. 첫째, Paddle의 KYC(판매자 신원 확인)가 완료되지 않았을 가능성. Paddle은 "당신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다"라는 승인이 끝나야 결제가 작동한다. 승인 전에는 결제 모달이 열려도 실제 처리가 안 된다. 둘째, Sandbox 키와 Live 키의 불일치. 테스트용 키(test_로 시작)와 실제 결제 키(live_로 시작)가 다른데, 테스트 키로 실제 결제를 시도하면 에러가 난다. 셋째, Paddle 대시보드에 등록한 상품 ID와 코드에 입력한 상품 ID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

세 가지 모두 "설정이 빠져있거나 맞지 않는" 유형의 문제였다. EP.05의 토글 하나와 같은 종류.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내가 배운 건 결제 에러의 해결법이 아니었다.

AI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 AI가 틀린 게 아니라, AI가 참조한 맥락이 오래되었거나 불완전했던 것이다. AI는 내가 준 정보 안에서만 판단한다. 내가 오래된 문서를 주면 오래된 판단을 한다. 내가 일부만 주면 일부에 근거한 판단을 한다.

그래서 AI에게 일을 시킬 때 중요한 건 "좋은 질문"만이 아니라 "좋은 맥락"이다. 그리고 AI의 답을 들었을 때, 그 답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건 내 몫이다. 관제탑이 제시한 진단을 그냥 실행하는 게 아니라, "이 진단의 전제가 맞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EP.03에서 나는 PM이고 AI는 유능한 신입이라고 썼다. 이 에피소드는 그 비유의 연장이다. 유능한 신입은 주어진 정보 안에서 훌륭한 분석을 한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가 틀리면, 아무리 훌륭한 분석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건 PM의 일이다.

내가 코드를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AI에게 어떤 맥락을 줘야 하고, AI의 답에서 어떤 전제를 점검해야 하는지 — 그건 코드를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결과를 바꾼다.


🔧 이 에피소드의 기술 용어 해설

결제 모달 (Payment Modal)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팝업 창. 쇼핑몰에서 "결제하기"를 누르면 나오는 카드 입력 화면. Paddle이라는 서비스가 이 창을 제공한다.

Paddle 결제를 대행하는 서비스. MoR(Merchant of Record) 역할을 하여, 각국의 세금 계산과 납부를 자동으로 처리한다. 글로벌 서비스를 운영할 때 특히 유리하다.

MoR (Merchant of Record) 법적으로 판매자 역할을 대행하는 서비스. 한국에서 만든 서비스를 미국인이 구매할 때, 미국 세금 규정을 MoR이 대신 처리해준다.

KYC (Know Your Customer) 판매자 신원 확인 절차. Paddle이 "당신이 정당한 판매자임을 확인했습니다"라고 승인해야 실제 결제가 작동한다.

Sandbox vs Live 테스트 환경과 실제 환경. Sandbox에서는 가짜 결제로 시스템을 시험하고, Live에서는 진짜 돈이 오간다. 테스트용 API 키와 실제 키가 다르며, 이를 혼동하면 에러가 발생한다.

BYOK (Bring Your Own Key) 사용자가 자기 AI API 키를 직접 제공해서 쓰는 모델. 서비스 제공자가 AI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므로 구독 가격이 낮아진다.